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 — 미연시 게임 시나리오 쓰다 손이 멈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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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시나리오를 쓰다가 손이 멈췄다.

주인공이 히로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장면. 어떻게 써야 플레이어가 "아, 이게 사랑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까.

화려한 고백? 극적인 장면? BGM과 함께 터지는 눈물 유발 대사?

한참 화면을 보다가, 갑자기 예전에 TV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팡이가 많네요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였다.

어느 시골 할머니 집 문 앞에 지팡이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진행자가 물었다.

"지팡이가 많네요."

할머니가 답했다.

"우리 영감님이 나보고 짚으라고, 나무 다듬어서 문 앞에 뒀어요."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돌아가셨어요."


병석에서도 할아버지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오래 못 산다는 걸. 그래서 나무를 베어다가, 앉아서 하나하나 깎기 시작했다.

아내가 편하게 짚고 다닐 수 있도록 키 높이를 맞췄다. 손이 다치지 않도록 더 섬세하게 다듬었다. 오래 쓸 수 있도록 단단한 나무를 골라서.

그리고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만들었다.

아내가 자신보다 훨씬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를 벨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병든 몸으로 나무 앞에 앉아, 깎고 또 깎으면서.

내가 가더라도 이게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라는 생각.

아내가 혼자 남았을 때 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지팡이가 닳아가는 동안 내 빈자리에 조금씩 익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


게임에서 사랑을 설계하는 일

나는 지금 미연시, 그러니까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고 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는 항상 이런 걸 고민한다.

이 장면에서 플레이어가 무엇을 느끼게 할까.
어떤 대사가 마음을 건드릴까.
감정이 쌓이는 타이밍을 어떻게 설계할까.

BGM 진입 포인트, 대사 호흡, 선택지 구조. 감동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들을 배치하는 일이다.

근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계산된' 작업이다.

플레이어가 감동받도록 설계된 감동.
눈물을 흘리도록 배치된 구조.


할아버지의 지팡이에는 그런 게 없었다.

관객도 없었고, 배경음악도 없었고, 연출도 없었다.

그냥 병든 몸으로 나무를 깎았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게 이렇게 울컥한 걸까.


설명하지 않는 것들

게임은 대사로 설명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내 마음 받아주세요."

감정을 언어로 압축해서, 선명하게 전달한다. 그게 게임의 방식이다.

지팡이는 설명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깎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할머니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그냥 문 앞에 세워진 지팡이들을 보면서 유추할 뿐이다.

"영감님이 이걸 만들면서 뭘 생각했을까."

그 침묵 속에 전달되는 것이 있다.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것. 아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크게 전해지는 것.


사랑의 무게가 달랐다.

게임 속 고백 씬은 정해진 무게만큼 감동을 준다. 내가 설계한 만큼.

지팡이는 다르다. 할아버지가 거기에 담은 것의 총량을 할머니도, 나도 끝내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무겁다.


시나리오를 다시 쓰면서

그날 이후로 주인공의 대사를 좀 줄였다.

극적인 고백 씬도 덜어냈다.

대신 이런 장면을 넣었다. 주인공이 히로인이 오래 불편해하던 것을 조용히 해결해놓는 장면. 말도 없이. 히로인이 나중에야 알아채는 구조로.

완벽한 재현은 아니다. 게임은 결국 설계된 구조물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 울어라"고 강요하는 느낌은 좀 줄었다.


할머니는 인터뷰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있으면 좋을 텐데. 영혼이 있다면 알겠죠. 꿈에라도 나와주세요. 궁금합니다."

수십 년을 같이 살고도 아직 궁금하다고 했다.

사랑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평생 궁금한 채로 남는 것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아직 그걸 게임으로 옮기지 못했다.

아마 끝까지 못 옮길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오히려 계속 시도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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